할리우드의 거목 시드니 폴락 감독이 지난 월요일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73세. 그는 감독, 제작자, 때때로 배우로서 할리우드를 이끌어 왔으며, 그의 영화 <추억(The Way We Were)>,<투씨>, <아웃오브아프리카>는 1970-80년대 가장 성공한 영화로 손꼽힌다.
유가족 대변인 레슬리 다트(Leslee Dart)에 따르면 사인은 암으로 알려졌다.
폴락 감독은 할리우드 시대의 산증인이다. 로버트 레드포드, 바바라 스트라이샌드, 워렌 베티와 같은 할리우드 빅스타들이 있었고, 그런 빅스타들을 다룰 줄 알았던 베리 레빈슨, 마이크 니콜스 같은 영화감독들이 할리우드 시스템을 개조해 나갔다. 영리한 제작자들은 스튜디오들을 손 안에 쥐고(스튜디오들끼리 경쟁시킴으로써), 예술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에 거액을 투자했다.
할리우드는 수상의 영예로 시드니 폴락 감독에게 화답했다. 그의 영화들은 수차례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다. 1985년 <아웃오브아프리카>로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그들은 말을 쏘았다(They Shoot Horses, Don't They)>, <투씨>로 감독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시드니 폴락이 제작하고 출연한 '마이클 클레이튼'은 올해 초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로 올랐다. 그는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부하직원에게 부조리를 강요하는 변호사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 주었다. ("이게 뉴스야? 이 사건은 첫날부터 냄새가 났다고!" 폴락이 분한 '마티 바흐'의 명장면) 가장 최근작으로는 <메이드 오브 아너(Made of Honor)>에서 패트릭 뎀시의 아버지 역할을 연기했다.
폴락 감독은 후반기에 독립영화 제작자로서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앤소니 밍겔라 감독과 함께 공동으로 영화 제작사 미라지 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면서 밍겔라 감독의 <콜드 마운틴>, 폴락 감독의 유작이 된 다큐멘터리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를 남겼다.
밍겔라 감독은 54세에 편도선암 수술 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다큐멘터리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를 빼면, 시드니 폴락 감독은 결코 스타배우없이 영화를 만드는 법이 없었다. 첫번째 작품 <가는 실(The slender Thread)>(1965년, 파라마운트 배급)에는 시드니 포이티어, 앤 밴크로프트가 출연했다. 그 다음 19편의 영화들은 코미디영화 <투씨>외에 모두 로맨스나 드라마였는데, 버트 랭카스터, 나탈리 우드, 제인 폰다, 로버트 미첨, 알 파치노, 톰 크루즈, 해리슨 포드, 니콜 키드먼, 바바라 스트라이샌드 등등의 대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다. 가장 많이 함께한 단짝은 로버트 레드포드였다.
"시드니와 나는 업무적으로나 사적으로 40년을 꼬박 넘는 세월이었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이메일을 통해 이와 같이 밝히며 "너무 개인적인 일인지라 인터뷰에서 거론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시드니 아이윈 폴락(Sydney Irwin Pollack)은 1934년 7월 1일 인디애나주 라파예트에서 태어나, 사우스 베스에서 자랐다. 그의 저서 <World Film Director>에 나온 본인의 말에 따르면, 약사였던 아버지 데이비드, (아버지의 전처) 어머니 레베카 밀러는 러시아계 미국인 이민 1세대로 퍼듀 대학에서 만났다.
시드니 폴락 감독은 사우스 벤드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뉴욕으로 가서 연기학교(Neighborhood Playhouse School of the Theater)에 입학했다. 거기서 스탠포드 연기과 주임 스탠포드 마이스너 교수 지도 하에 2년을 공부했고 마이스너의 조교로 5년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 폴락은 연기를 가르치는 한편 동시에 무대나 TV에 출연하기도 했다.
곱슬멀머리에 키가 거의 6피트 2인치(188cm)였던 폴락은 1959년 <플레이하우스90(Playhouse 90)>에서 주목할만한 연기를 펼쳤다. 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각색하여 존 프랭크하이머가 감독한 TV판 드라마이다. 폴락은 초기에 <A Stone for Danny Fisher>에서 제로 몬스텔, <The Dark Id Light Enough>에서 캐서린 코넬과 함께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그러나 후에 아마 브로드웨이에서 주인공으로 경력을 쌓을 순 없었을 거라고 말한 바 있다.
대신에 폴락은 프랭크하이머 감독과 일하면서 만났던 랭카스터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감독으로 전향했다. 랭카스터는 폴락을 당대의 엔터테인먼트업계 거물 루 와서맨(Lew Wasseraman, 할리우드 스튜디오 사장)에게 연결시켜 주었고, 그를 통해서 폴락은 TV시리즈 <Shotgun Slade>의 감독일에 첫발을 내딛었다.
시작은 주춤했지만 그후, <벤 케이시(Ben Casey)>, <벌거벗은 도시(Naked City)>, <도망자(The Fugitive)> 에피소드와 몇몇 다른 쇼들로 감독으로서 본격 궤도에 올라섰다. 1966년에는 <Bob Hope Presents the Chrysler Theater> 에피소드의 감독으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그의 첫 장편 데뷔작 <가는 실(The Slender Thread)>(;사회복지학생이 안내전화로 한 여인의 자살을 만류하는 내용)을 만든 후로 폴락 감독은 비평가들과 악연과 호연의 관계를 가져왔다. 뉴욕타임즈에서 A.H. Heiler는 폴락의 영화를 "거품낀 진부함의 물결(Sudsy waves of bathos)"이라며 맹비난했다. 폴락 자신은 후에 이를 두고 "끔찍한 평"이라고 발언했다.
그럼에도, 시드니 폴락 감독은 영화경력 초기부터 또한 과거를 타파한 세대로 인식되었다. 1965년에 찰스 램플린은 LA타임즈에서 시드니 폴락 감독을 서부 코미디 <캣 발로(Cat Ballou)>의 앨리엇 실버스타인 감독, <Cool Hand Luke>로 유명세를 탄 스튜어드 로젠버그 감독과 견주었다. 기사에서 챔플린은 이 세 감독을 예로 들며 기량을 닦기 위해 B급 영화보다는 텔레비젼을 이용한 예술가로 칭했다.
자기비평적이고 할리우드와는 결코 느긋하지 못했던 시드니 폴락 감독은 한결같은 창작권에 대한 갈망을 표명해왔다. 호레이스 맥코이의 소설에 기초한 작품으로, 대공황기 마라톤 댄서들간의 사랑과 죽음에 관한 우화 <그들은 말을 쏘았다(They Shoot Horses, Don't They)>로 아카데미상에서 감독상을 포함 9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다. (긱 영은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2년 후 시드니 폴락 감독은 산사나이의 모험담을 그린 <제레미아 존슨>을 만들었다. 로버트 레드포드를 출연시켜서 폴락의 영화에서 정형화시킨 세 편의 영화 중 하나다.
두번째 영화는 엇갈린 운명으로 후에 재회하게 되는 연인을 다룬 영화, <추억(The Way We were)>이다. 바바라 스트라이샌드가 출연해서 악평에도 불구하고 빅히트를 쳤다.
그 다음은 <콘돌(THree days od the Condor)>로, 학자로 위장한 CIA요원이 음모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줄거리이다. 비평가로부터 한결 나은 평가를 받았다. 시카고 선타임즈의 로저 에버트는 "긴박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평했다.
<선택(Absence of Malice)>과 함께 시드니 폴락 감독은 본격적인 논쟁대상이 되었다. 한 회사원으로부터 정보를 캐내기 위해 연방공무원에게서 신문사 기자가 잘못된 정보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묘사한 알랜 J 파큘라 감독의 성공작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을 좇아 언론의 역할로서 부정폭로기자를 폭넓게 조명했다.
유일하게 <투씨>에서 폴락 감독은 할리우드 배우시스템을 전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그때까지 마이클 오비츠와 급속하게 성장중인 CAA(Creative Artists Agency)가 폴락 감독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다. 투씨의 주인공인 더스틴 호프만도 그 곳 소속이었다.
텔레비젼 역할을 따내려고 여장한 남자가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이 코미디영화 때문에 매니저 마이클 오비츠의 양쪽을 오가는 이간질과 더불어서 시드니 폴락 감독과 더스틴 호프먼은 반 공적으로 불화관계에 휩싸였다.
호프먼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좀 더 코믹적으로 접근하려고 논의했다. 반면, 극중 호프먼의 매니저를 연기했던 시드니 폴락 감독은 여장남자 호프먼과 여주인공 제시카 랜지의 운명적인 로맨스에 치중했다.
폴락 감독이 모든 면에서 설득적이지 못했다면, 그 영화는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투씨는 제작과정에서의 잡음과 예산 초과 문제로 제작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투씨는 역시 승자였다. 미국 내에서만 1770억원($177,000,000) 이상의 수익을 올렸고, 작품상을 비롯 아마데미상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제시카 렌지만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마이클 오비츠의 지원으로 폴락 감독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다음 수 해 동안 그는 크트라이스타 픽쳐스, 유니버셜과 친밀하게 작업했다. 폴락 감독은 트라이스타 픽쳐스에서 크리에이티브 자문가로 일한 바 있고, 폴락 감독의 프로덕션 회사인 미라지 엔터테인먼트를 세운 곳이 유니버셜이다.
시드니 폴락 감독은 어쩌면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정상에 올라섰던 지도 모른다. 아이작 디네센의 회고록을 토대로 하여, 폴락 감독의 단골주제인 불운한 연인의 이야기로 재가공됐다.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인으로 공연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시드니 폴락 감독의 영화적 스킬은 여전히 쉽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지난 해,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와의 인터뷰에서 폴락 감독은 "내 스스로 위대한 사진가라든가 비쥬얼 스타일리스트라고 불렀던 게 결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영화 감독직으로 조심스럽게 명성을 쌓았다. 시드니 폴락 감독은 영화감독일에 처음에는 관심을 표명했다가 차츰 발을 떼기도 했다. 더스틴 호프먼이 나온 레인맨은 처음에 시드니 폴락이 감독하기로 했지만 결국엔 베리 레빈슨이 감독했고, 존 르 카르(John Le carre) 감독의 <The Night Manager> 수정판도 그러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시드니 폴락 감독은 <하바나>를 찍으면서 영화적 신중함을 배웠다. 1990년작 <하바나>는 로버트 레드포드와의 마지막 작업이 됐다. 어느 누구에게도 기쁜 일 같지는 않았다, 물론 시드니 폴락 감독은 그 사실을 옹호했지만 말이다. 1993년 LA타임즈에서 "솔직히 그 때 잘못된 걸 알았더라면, 바로 잡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야망의 함정(The Firm)>은 그 해의 히트작이었다. 그러나 해리슨 포드가 출연한 <사브리나>와 <랜덤하트>, 니콜 키드먼과 숀펜이 나온<인터프리터>는 저조했다. 당시 할리우드와 주관객층들은 환타지와 특수효과를 선호해서 스타배우를 기피했다.
시드니 폴락은 끝까지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할리우드를 다룬 HBO의 드라마 <앙트라지>의 최근 에피소드에서는 시드니 폴락 감독 자신을 연기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클레어 그리스울드와 두 딸 레베카, 레이첼이 있다. 아내와는 2년간의 군복무 기간 중에 결혼했다. 외아들 스티븐은 34세에 캘리포니아 말리부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말년에는 영화계 원로로서 그의 역할을 만끽했다. 액터 스튜디오 웨스트(Actor Studio West)의 경영진, 아메리칸 시네마테크(American Cinematheque) 의장을 역임했으며 예술인 권익을 대변했다.
폴락 감독은 전성기 시절의 할리우드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두고 아쉬워했다. New Perspectives Quarterly 1998년 가을판에서 "이제 중립지대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동료 제작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정말 좋은 주류영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코스타 가브라스도 사고는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라고 덧붙였다.
[원본기사]
Sydney Pollack, Director of High-Profile Hollywood Movies, Is Dead at 73
NEW TORK TIMES / May 27, 2008
translated by kokomo